유엔평화기념관 기념사업
기념행사배경이미지

이달의 참전국

집이미지  >   기념사업  >   이달의 참전국

2023년 11월의 유엔참전국 태국
작성자 유○평 작성일 2023-11-01 조회수 929

 



2023년 11월의 유엔참전국 태국
선정 기준 : 1950. 11. 22. 최초전투일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엔참전국 22개국에서 195만7733명이 참전했습니다. 참전용사들의 용기와 활약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하였습니다. 유엔평화기념관은 뉴스1과 함께  2023년 정전 협정 70주년을 기념하며 ‘이달의 유엔참전국’ 연재를 통해 유엔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활약상을 조명하고 기억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안이 결의되자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지원 의사를 표명한 태국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될 뻔하였던 상황에서 국제적으로 고립될 위기에 처해있어 전후 복구에 힘겨운 정세였습니다. 처음에는 직접참전 대신 자국의 주산물인 쌀을 한국에 식량 원조로 제공하겠다고 유엔에 의견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엔사무총장의 군사 지원 호소로 태국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통해 1개 여단 규모의 지상군 파병을 결정하고 국회의 동의와 국왕의 승인 거쳐 7월 23일 지상군을 파병하겠다는 전문을 유엔에 발송하였습니다. 

 

태국 정부는 앞으로 해·공군병력도 파병할 것을 고려하여 이 부대를 「파한(派韓) 타이왕국 원정군」이라 칭하고 황태자 피싯다사퐁 디사쿨(Pisit Dispongsa-Diskul) 소장을 태국 원정군사령관에 임명하는 등 참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였고, 태국 국방부는 7월 30일부터 8월 10일까지 파병을 위한 지원병을 모집하였습니다. 그 후 당시 태국의 국내외 상황을 고려하여 파병 규모를 기존의 1개 여단에서 1개 대대 규모로 축소 조정하고 아타난타(Kriengkai Attananta)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950년 10월 22일 방콕을 출발하여 11월 7일 부산에 도착한 태국 대대는 대구의 유엔군수용대로 이동하여 3주간에 걸친 부대정비와 현지적응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11월 28일 평양으로 진출한 태국군은 극심한 추위와 싸우며 참전 초기 평양-수원 철수엄호작전을 수행하였고, 이후 상주-문경지구 주보급로 경계 및 대비정규전, 제임스타운(Jamestown)선 진출과 방어전, 철의 삼각지대의 포크찹(PORKCHOP)고지 전투, 김화 351고지 전투 등을 수행하였으며 특히 포크찹고지 전투 당시 3차에 걸친 중공군의 공격을 백병전으로 격퇴함으로써‘작은 호랑이(The Little Tigers)라는 애칭을 얻었습니다.

 

태국 정부는 육군에 이어 해군도 파견하였다. 1950년 10월 1일 프리깃함 2척과 수송선 1척으로 편성된 태국 해군에 파병 준비 명령이 하달되었고, 부대장으로 임명된 와치차이(Ulhichamarp Wathichai) 해군 중령에게는 지상군 병력의 해상 수송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태국함대는 10월 22일 지상군 1개 대대 병력과 적십자 의무요원들을 태우고 방콕을 출항하였습니다. 그 후 함대는 미 극동해군 사령부의 제95기동부대에 배속되어 해상작전을 수행하였고 육군과 해군을 파견한 데 이어 태국 정부는 1951년 6월 18일 C-47 쌍발수송기 3대로 편성된 수송기 편대와 외과의사 2명 및 간호사 3명으로 구성된 항공의무대를 일본에 위치한 미 공군 제315비행사단 소속의 제374비행단에 파견하여 항공 지원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로써 태국이 육·해·공군을 모두 팍견하고 공군의무대, 적십자의무대, 야전병원 실무 교육 요원 등 독립된 3개 의무대를 파견한 아시아의 유일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정전협정 이후 1954년 9월 미 제 2사단에서 미 제7사단에 배속 전환되어 운천에 주둔하였고 그 후 1970년 11월 16일 운천에서 의정부 남쪽 근처로 이동하여 1972년 6월 21일 유엔군사령부 연병장에서 환송식에서 한국의 국무총리 임석하에 부대 표창장을 수여 받고 귀국하였습니다.